베를린에서 우리는, 서로의 고향이 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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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우리는, 서로의 고향이 되어갑니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살고 있을까.
서울의 익숙한 골목길도, 부모님이 계시던 집도, 친구들과 아무 생각 없이 만나 소주 한잔 기울이던 그 자리도 이제는 비행기를 타야 갈 수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처음 베를린에 왔을 때는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거리의 간판도 낯설고, 사람들의 말도 알아듣기 어려웠습니다.
빵집에 들어가 빵 하나를 고르는 일도 쉽지 않았고, 관공서에서 서류 한 장을 처리하는 일도 긴장이 되었습니다.
아프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집에 문제가 생기면 누구에게 연락해야 하는지, 중요한 편지가 오면 그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조차 하나하나 배워야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베를린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바빴습니다.
학교를 다니고, 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집세를 내고, 세금을 내고, 독일어를 배우고, 때로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돌아서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 우리는 베를린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독일의 계절을 알고, U-Bahn과 S-Bahn의 노선을 익히고, 일요일에는 가게가 문을 닫는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한국이 있었습니다.
김치 냄새가 그리웠고, 따뜻한 국 한 그릇이 생각났습니다.
누군가 한국말로
“식사는 하셨어요?”
라고 물어주는 그 짧은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타국에서는 우리가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것들이 특별해집니다.
한국어로 웃을 수 있다는 것.
한국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를 수 있다는 것.
김치찌개 하나를 놓고도
“이 집은 좀 싱겁네.”
“그래도 맛있다.”
하며 웃을 수 있다는 것.
명절에 함께 송편을 먹고, 설날에 떡국을 먹고, 누군가 한국에서 가져온 과자를 나누어 먹는 것.
그 작은 순간들이 우리에게는 고향이었습니다.
베를린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어려움을 너무나 잘 안다는 것입니다.
독일어가 서툴러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서툰 독일어를 기다려줍니다.
관공서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본 사람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정보를 먼저 알려줍니다.
처음 독일에 온 사람에게 집을 구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병원에 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학교와 직장 이야기를 나누어 줍니다.
누군가는 자동차를 빌려주고,
누군가는 공항에 데리러 가고,
누군가는 이사할 때 손을 보태고,
누군가는 말없이 밥 한 끼를 사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때때로 그런 도움을 받으며 생각합니다.
“세상에, 참 고마운 사람이 많구나.”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됩니다.
그때 받은 도움은 언젠가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돌려주게 된다는 것을.
아마 그것이 해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별한 힘일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가족은 아니지만, 때로는 가족보다 더 따뜻하게 서로를 챙깁니다.
고향이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처음 만난 사람과도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깨닫습니다.
고향은 반드시 내가 태어난 곳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향은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는 곳이고,
힘들 때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는 곳이며,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곳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를린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작은 고향들이 참 많습니다.
한인 식당의 한쪽 테이블에도,
교회의 한구석에도,
학교와 직장의 휴게실에도,
골프장과 동호회의 모임에도,
그리고 누군가의 집에서 함께 먹는 김치찌개 한 냄비에도
우리의 고향이 있습니다.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갑니다.
처음 베를린에 왔을 때 젊었던 사람은 어느덧 중년이 되었고,
아이들은 어느새 독일어를 더 편하게 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려고 애썼지만,
어느 순간 아이들이 우리에게 독일어 단어를 알려주는 날도 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며 생각합니다.
“내가 벌써 이렇게 나이가 들었나?”
그때 우리는 깨닫습니다.
우리 인생의 상당 부분이 이미 베를린의 역사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베를린의 거리에는 우리가 흘린 땀이 있고,
우리가 키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있고,
우리가 이루어낸 작은 성공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베를린에 와서 단순히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이 도시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회사를 세웠고,
누군가는 학문을 공부했고,
누군가는 예술을 했고,
누군가는 묵묵히 가족을 위해 일했습니다.
누군가는 실패했고,
누군가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누군가는 사랑을 만나 가정을 꾸렸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이겨냈습니다.
그 모든 시간이 바로 우리의 베를린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서로에게 조금 더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이가 다르다고,
사는 형편이 다르다고,
생각이 다르다고,
세대가 다르다고
서로의 마음에 벽을 세우기보다는,
“같은 곳에서 살아가는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를 조금 더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베를린에 처음 왔다면 먼저 손을 내밀어 주고,
누군가 힘들어 보인다면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고,
누군가 좋은 일을 했다면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누군가 실수했다면 한 번쯤은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밥 한 끼,
커피 한 잔,
전화 한 통,
그리고
“잘 지내시죠?”
그 한마디면 충분할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베를린을 떠날 날이 올 것입니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또 다른 나라로 갈 수도 있고,
이곳에서 평생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 살든 우리는 베를린에서 보낸 시간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눈 내리던 겨울의 베를린,
낙엽이 아름답던 가을의 베를린,
여름밤 늦게까지 해가 지지 않던 베를린,
그리고 그 거리에서 함께 웃고 울었던 사람들.
아마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도 우리는 기억할 것입니다.
“그때 참 열심히 살았지.”
“그때 참 외로웠지.”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 참 많았지.”
그리고 누군가 우리에게 묻는다면,
“베를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아마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베를린의 건물도 아니고, 유명한 관광지도 아닙니다.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힘들 때 내 손을 잡아주었던 사람,
멀리 한국에서 온 소식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
아무 이유 없이 밥 한 끼 사주었던 사람,
내가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주었던 사람.
그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낯선 땅에서 외롭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베를린에 처음 온 사람에게 작은 등불이 되고,
힘든 사람에게 잠시 쉬어갈 의자가 되고,
외로운 사람에게 따뜻한 밥 한 끼가 되고,
그리고 한국을 그리워하는 사람에게
“여기에도 당신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타국에서 살아온 세월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 세월 동안 우리는 강해졌고,
더 넓어졌으며,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압니다.
고향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베를린에서 살아가는 우리.
서로 다른 시간에 이곳에 왔지만,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손을 잡아주고,
서로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우리의 머리가 하얗게 세고,
베를린에서 보낸 시간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게 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참 잘 살았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여서 행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멀리 떠나온 당신,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낯선 땅에서 가족을 지키고, 꿈을 지키고, 자신의 삶을 지켜낸 당신은 충분히 잘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의 베를린에서
서로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어 살아갑시다.
우리가 서로의 고향이 되어줍시다.
베를린에서 만난 우리,
그리고 앞으로 베를린에서 만나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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